본문 바로가기
이주민선교정보/이주민 선교정보

<선교타임즈 선교광장> 무함마드 만평이 촉발한 이슬람권 폭동의

by 위디국제선교회 2009. 4. 14.
2006-03-31

<선교광장> 무함마드 만평이 촉발한 이슬람권 폭동의 의의
김도흔 총무

무함마드 만평이 촉발한 이슬람권 폭동의 의의

김도흔 총무
( 중동선교회 )


지난 해 9월 덴마크의 신문 ‘율란츠 포스텐’에 실렸던 12컷의 무함마드 만평이 촉발한 폭동이 이제야 간신히 고비를 넘기고 정리수순을 밟고 있다. 최근에 꾸준히 외신란을 장식하는 이슬람권의 테러와 폭동소식을 접하면서 그 문화만의 독특한 반응, 즉 ‘지켜야 하는 신 알라와 코란,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비단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범 이슬람권에서 이루어진 폭동과 시위로 여러 나라에서 적어도 100여 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이란은 덴마크와의 모든 경제교역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새삼스럽게 세계 제 2차 세계대전 때의 불행한 사건인 ‘홀로코스트’의 진위여부가 논란에 휩싸이는 등 그 여파와 후유증이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번 폭동에 앞서서 작년 하반기 한참 세계의 걱정어린 주목을 받았던 유럽 내 무슬림 청년들의 폭동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는 유럽사회에 노동자 계급으로 적잖이 이주하여 정착한 무슬림들이 그 주류사회와 문화에 동화되지 못해 발생한 인종적 문화적 경제적 갈등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표현이 폭동과 방화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드러난 것이 참으로 유감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자면 역시 지난 해 이슬람권을 달구었던 관타나모 미군기지에서 이루어졌던 ‘코란 모독 사건’이 있다. 코란을 절대적으로 신성시하는 현지 무슬림 병사들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해 미군 병사들이 코란을 찢어서 변기에 흘려보낸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연이어 시위를 벌이면서 자신들의 종교 경전을 훼손한 미국과 미군 병사들을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면 인도 출신의 영국 소설가 살만 루시디가 발표했던 화제의 소설 ‘악마의 시’ 역시 선지자 무함마드를 성(性)을 밝히는 사람으로, 그의 집이 홍등가와 유사하지 않았을까 상상하여 써내려간 내용 때문에 온 이슬람권이 들고 일어나 작가를 비난했던 기억이 새롭다. 특히 이란에서 회교혁명을 통해 극단적인 보수주의 신정정치체제를 굳건히 하던 호메이니를 위시한 지배계층에서 “살만 루시디를 죽이면 수백만 달러를 주겠다”하면서 드러내놓고 작가에 대한 살해를 부추긴 사건이 있었다. 작가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 ‘악마의 시’를 번역했던 번역가가 실제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일일이 예를 들기가 벅찰 만큼 연이어 터지는 이런 뉴스를 보며 도대체 이슬람교는 어떤 종교이기에, 코란과 선지자 무함마드는 어떤 존재이기에 이다지도 툭하면 폭동과 시위, 어수선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교가 평화의 종교, 깊이가 깊은 신비의 종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일견 맞는 것이며 틀린 견해가 아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분을 들여다보면 이슬람교는 배신자에 대한 응징을 가르치는 종교이며 타종교에 대한, 특히 절대신 알라에 대한 이견이 있는 종교를 배척하는 종교이며 정치적인 배경 때문에 성장한 종교라고도 볼 수 있다.

이번 폭동만 해도 작년 9월 덴마크 신문에 기재된 후 수개월 아무런 일 없이 유야무야(有耶無耶)지나가는 듯 했다. 그러다가 세계 최대 이슬람 단체인 이슬람회의기구(OIC)의 회의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면서 갑자기 이슬람권 내 각 국가의 언론들이 비판적인 보도를 시작했고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 폭력 과격시위로 불이 번진 것이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폭동이 왜 발생하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로서 현재 이슬람권의 각 국가들은 서구의 영향을 받아 민주화된 선거를 연이어 치루고 있다. 민중의 다양한 정치적 요구들로 인해 적잖은 정치적 지형의 변화에 직면한 기득권층은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의 힘에 기대어 장기집권을 이루어 온 집단들에게 당연히 위협적인 것이다. 때문에 기존 정치세력들의 이해타산에 의해 이번 사건이 이슈화 되었고 결과적으로 정치적 갈등의 초점을 흐리기 위해 폭동으로까지 번지게 된 ‘위장된 관제’ 시위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나중에야 폭동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정치이슈로까지 다루어지자 어슬렁거리는 느낌으로 자제를 촉구한 이슬람 측의 반응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안으로는 정치와 종교의 개혁과 민주화 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포석으로, 대외적으로는 서구, 특히 미국과 유럽국가들 중 자신들과 적대적인 입장에 있는 국가들에게 정치적으로 부담을 지우기 위해 활용한 것이라는 분석을 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 본다면 이슬람교의 특징은 사람들이 나서서 그 지위와 신성을 보호해야 하는 종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 절대신이나 선지자, 경전을 비판하고 훼손한다고 해서 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지는 않는다. 정도가 심하다면 유감 표명 정도나 한다고 할까? 그에 비하면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의 반응은 어딘가 모르게 지나친 면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신문에서 만평 몇 컷 실은 데 대한 반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격렬하고 구체적인 반발이 의아스럽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믿는 그대로 알라가 전지전능한 신이며 무함마드만이 유일무이한 선지자라면 그 말씀을 기록했다는 코란이 훼손되고 알라의 신성이 격하될 경우 신의 힘으로 직접 벌을 내리거나 선지자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책망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굳이 사람이 나서서 신성을 보호해야 하고 경전을 신성시 하고 선지자를 옹호해야 한다면, 힘들고 어려워서 그 신앙을 어떻게 간직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기초적으로 알기에도 종교는 절대자에게 귀의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고 삶의 회복을 갈구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걸핏하면 총을 쏘고 돌을 던지며 기물을 파괴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종교라면 그것이 종교로서 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이슬람교가 창시되던 기원 후 600년대 즉, 7세기의 상황을 예로 들 수 있다. 원래 알라라는 신의 이름도 창시자 무함마드가 속한 ‘쿠알라이쉬’ 민족의 민족신 이름이었다는 전래설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무함마드는 자신의 민족신 이름에 낙타를 타고 무역업을 하던 대상들에게서 전해들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연결지어 알라만이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상상했던 것은 아닐까? 만약 이슬람교가 종교로서 참다운 포용력을 보일 수 있다면 이런 정도의 이성적인 비난은 대수롭지 않게 품어야만 하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느끼고 있는 ‘평화와 신비의 종교’로서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 적잖은 수정을 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범 이슬람권으로 확대되어 많은 우려를 낳았던 폭동은 다행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와 뿌리 깊은 서구 - 이슬람 간 갈등은 역사적 연원과 감정적인 대응·풀기 어려운 종교간 교리의 이해관계가 현실적인 정치, 경제, 군사적 이견과 맞물려 지구촌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양측을 모두 품는 입장에서 깊은 이해와 기도를 통해 구체적인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무슬림 선교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한다. 21세기 최우선 과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바로 10억을 헤아리는 이슬람교인들 즉, 무슬림 선교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세속적 시각에 따라 언론 자유를 내세운 유럽과 신성 모독이라며 맞서는 아랍권 사이의 무하마드 만평 파문은 코란을 악마의 계시에 빗대어 쓴 살만 루시디(59)의 소설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에 버금가는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